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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 임용시험 준비

중등 임용 체육, 한국 체육사

by 름푸파파 2023. 1. 13.

삼국 및 통일 신라

교육

고구려는 태학과 경당, 백제는 박사제도 신라는 국학과 화랑 제도가 있었다.

 

체육

삼국 시대에는 말을 타는 기마술과 활을 쏘는 궁술이 주된 수련 활동이었다. 서대에서 활을 쏘는 궁전법으로 인재를 등용했고 산속에서 신체적 고통을 통해 신체와 정신을 강화화는 입산 수행과 신체 정신을 수양하는 편력 활동이 체육활동으로 존재했다.

신라의 화랑도 체육은 정신 교육기관은 아니었지만 용감한 병사 육성을 위한 실천적 인간 육성에 기여하고 도덕적 인간의 육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군사적, 교육적인 측면에서 의의를 갖는다. 화랑도 체육은 고대 한반도에 체계적인 체육활동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심신일체 사상을 바탕으로 전인교육적 체육활동이었다는 점이 현대 체육의 목적 개념과 일치하다는 부분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삼국 시대 민속 스포츠와 오락 활동으로는 매를 사냥하는 방응, 돌싸움인 석전, 지금의 씨름과 형태가 유사한 각저 등이 있었다. 전통 놀이인 투호는 단순한 놀이활동을 넘어 자신을 수양하고 대인관계에서 예의를 통한 군자의 태도를 학습하는 인격수양의 의미도 가졌다.

 

고려시대의 체육과 스포츠 문화

무예 체육

고려시대의 국학의 7재 중에는 무학을 공부하는 강예제가 존재했으며 향학에서는 궁사와 함께 음악을 즐겼다. 또한 전통 무예인 수박희는 인재 선발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고려시대는 숭문천무 사상이 지배적이었으나 무신 반란으로 인해 무인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삼별초와 도방을 두어 무예 발달을 위해 힘을 썼다.

 

체육

고려시대 귀족사회에서는 페르시아의 '폴로'와 유사한 격구가 있었는데 말타기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연무의 수단이면서도 귀족들의 오락 및 여가 활동으로 성행하게 됐다.

서민들은 지금의 그네뛰기와 같은 추천과 돌 싸움인 석전을 즐겼는데 석전은 국속으로서, 무예로서, 관중 스포츠로서의 기능을 하며 서민들 사이에서 성행하게 됐다.

 

조선시대의 체육과 스포츠 문화

사회와 교육

조선시대는 숭유배불 정책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던 시기였다. 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과 4학, 향교가 있었고 무학은 훈련원에서 주관했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문치 주의로 무학을 등한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무관채용 시험은  초시의 경우 서울은 훈련원, 지방은 각도의 병사에서, 복시와 전시는 병조와 훈련원에서 이루어졌다. 

 

무예 체육

훈련원은 학교 기관은 아니었으나 무인 양성과 관련된 공식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사정은 전국적인 무사를 양성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전국 각지에 산재했다. 무예교육은 개인적 교육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대표적인 무예서적으로는 임원경제지와 무예도보통지가 있다. 임원경제지는 과학적인 활쏘기 방법을 소개한 반면 궁사만을 장기로 삼아 외적에게 당했다고 생각해서 무예도보통지에는 활쏘기 방법이 소개되지 않았다.

궁술은 무예의 기능으로 시작했지만 총포의 발달로 스포츠적 성격을 지닌 활동으로 변화했다. 향사례는 예양훈련을 목적으로 조선양민의 체절 향상과 상무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목적의 활동으로 군민체육 대회의 근대적 성격을 함축한 행사였다. 

 

체육

귀족들은 편을 나누어 활을 쏘는 놀이인 편사를 즐겼는데 이를 통해 상무정신을 함양하면서 여가활동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며 사회체육 활동을 이어갔다.

민중들은 필드하키와 유사한 장치기 인색희, 도색희와 같은 활동을 즐겼다.

조선은 숭문천무와 문무겸전이 대립한 시기이나 무인교육을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화기의 체육과 스포츠 문화

교육개혁

갑오개혁을 통해 기존 무예 중심의 체육에서 사회체육과 과학적 체육이 강조된 현대 체육의 모습으로의 변화가 시작된다. 갑오개혁은 지덕체를 강조하며 체육이 중요한 교육영역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체육

조선체육의 발전은 태동기, 수용기, 정립기 단계로 구분된다.

태동기 교육기관은 원산학사였다. 원산학사는 최초의 근대 사립학교로 전통적 무예가 교육과정 속에 최초로 채택되고 중시되었다. 원산학사는 외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한 무비자강책으로 무사의 입학생이 많았고 군사체제를 위한 국민 체육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수용기는 기독교계 사립학교가 큰 역할을 했다. 근대화된 서양식 신문화가 보급되며 유교적 이념에서 탈피한 근대적 성격의 제도화된 교육과정이 도입됐다. 체조는 기독교계 사립학교 정식교육과정에 선택 또는 필수과목으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에 현대화 비슷한 체육문화가 정착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스포츠

학교 스포츠가 발달하며 운동회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운동회는 과외 활동의 일환으로 육상중심의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최초의 운동회는 영어학교에서 개최한 화류회로 이는 주민들의 향촌 축제 성격으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띠며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국민의 스포츠 사회화에 영향을 주어 사회 체육발달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근대 스포츠도 이 시기에 도입되었는데 축구는 구기 중 가장 먼저 소개되었으며 최초의 경기는 황성기독청년회와 오성학교 간의 시합이었다. 대부분의 활동이 YMCA를 통해 도입되었다. 

스포츠가 발달하며 여러 체육단체가 결성되었다. 체육단체들은 사회 체육발달을 촉진하면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개화기 체육은 체육의 개념 및 가치에 대한 근대적 각성이 이루어지고 교육 체계 속에서 체육의 위상이 정립되는 시기였으며 근대적인 체육 및 스포츠 문화가 창출되는 출발점이었다는 부분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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